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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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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사진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에서 태어나다.
1906년 교회에 나가다. 덕일학교 입학하다. 학습교인이 되다.
1914년 신의주 공립 양시소학교에 들어가다.
1917년 공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다. 황득순과 결혼하다.
1919년 3.1만세 학생시위에 앞장서다.
김마리아 강연 참석후 "빠르나 급하지 않게" 걷는 습관을 평생 걸음걸이로 삼다.
1921년 오산학교 3학년 편입, 유영모 선생을 만나 인생길의 방향을 찾다.
1923년 오산학교 졸업, 동경 유학을 떠나다.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에 입학, 재일본조선교육연구회 창립회원이 되다.
시인 셸리를 "인생의 친구"로 삼다.
1927년 신앙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과 동시에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1934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발표하다.
1938년 오산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사임하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 수감되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다.
1945년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으로 재임 중 "신의주 학생사건" 주범으로 몰려 소련군에 의해 처형과 유배의 위기에 처해지다.
1947년 월남하다.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를 쓰다.
1953년 시집 <수평선 너머>를 내다.
1954년 개인 잡지 <말씀>을 창간하다.
1956년 <사상계>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하다.
1957년 씨알농장을 시작하다.
1958년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의해 투옥되다.
1961년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인간혁명>을 발표하다.
1963년 군사정권을 비판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사상계사가 제정한 월남언론상을 받다.
1964년 한일협정을 반대하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출간하다.
1969년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서다.
1970년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다.
1971년 인도에서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를 만나다. 전태일 1주기 추모 집회를 열다.
1972년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하다.
1973년 구화고등공민학교를 운영하면서 씨알교육의 터를 닦다.
1974년 유신체제 철폐를 위한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가 되다.
1975년 민주국민헌장을 발표하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군법회의에서 징역8년을 선고받다.
1978년 부인 황득순이 별세하다. 북괴란 말을 쓰지 말자고 주장하다.
1979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다. YW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구금되다.
1980년 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복권되다. <씨알의 소리>가 두 번째로 폐간되다.
1983년 원효로 4가 70번지에서 본 기념관 자리인 쌍문동으로 옮기다.
1985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 번째로 추천되다. 쌍문동 가옥이 완전히 불에 타다.
1986년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창립식에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고치자고 주장하다.
1987년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제1회 인촌언론상을 수상하다.
1988년 88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추진위원회 공동의장을 맡다. 자신의 몸을 실험용으로 오산고등학교에 기증할 뜻을 밝히다. <씨알의 소리> 복간호를 내다.
1989년 2월 4일 새벽에 영면하다.